서양인들이 본 개화기 조선과 조선인들
이달부터 '서양인들이 본 조선과 조선인들'이라는 새로운 시리즈를 연재합니다.이조말 특히 개화기에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직, 간접으로 조선의 개화에 일조를 하면서 남긴 기록들을 찾아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미 번역, 출판된 것들은 가능한한 그대로 소개하려 합니다.
이달에는 제임스 게일의 코리언 스케치(Korean Sketches, 현암사 간행)에 실린 '새 해'란 글을 소개합니다. 이상하기만 했던 파란 눈에 비친 '세시 풍속도'가 아련히 떠오릅니다.
J.S. 게일 목사(1868-1937, 한국명 기일奇一)는 미국의 선교사요 신학박사로 한국어 학자이기도 합니다. 1889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당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정신생활 면에서 역사상 가장 참담한 시련을 겪고있던 이조말기의 현황을 직접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대로 스케치 한 것이 <Korean Sketches>입니다.
변환기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풍습 등에 관한 관심과 연민을 가지고 이 책을 썼으며 후에 <한영사전>을 비롯해서 한국문화에 관한 많은 저서들을 출판하였습니다.
James Gale:Korean Sketches(현암사 간행)에서
새 해
조선인은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절기를 나눌 때에 해보다도 달을 따르기를 더 좋아 한다. 조선인들은 오랫동안 미신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해 왔다. 어둠침침한 데를 비틀거리면서도, 자기 자신은 태양이 환하게 비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초 명절의 마지막 날, 정월 보름날 밤이면, 조선인들은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다리 위에 돗자리를 내다 깔아 놓고 달한테 세 번 절하며 새해에는 복되고 무사하기를 빈다. 수 백년째 주의 깊게 관찰한 것들의 이점과 특징이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의 모든 점장이들은 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다. 예컨대 달의 좋은 암시, 위험한 징후, 또는 별난 변덕따위에 대해서 모르는게 없다.?
1년 열 두달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달은 첫 달의 첫 날밤에 빛나는 초승달이다. 조선인은 누구나 이 달과 함께 낡은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새로와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빚을 갚고 새옷을 입고 마을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나이 어린 사람들한테서는 세배를 받는다, 이런 절차가 다 끝난 다음에도 뭔가 모자라는 것이 있고 또 공허감이 따르는 듯, 뭔가가 그의 뒤를 따라 다니는듯 하여 있는 힘을 다 해 그것을 떨쳐버리려고 애쓴다. 그들은 무당과 점장이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이 굿을 하거나 점을 치는 동안에 그들한테서 한 해동안 사는데 필요한 충고를 받는다.
조선에서 우리를 돕던 요리사는 호전적인 기질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고칠수가 없어 툭하면 다투었고 다쳤다. 우리는 기독교식 생활태도로 극복하도록 하라고 권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조선사람들에게도 역시 방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새해에는 끝장을 보겠다고 말했다. 새해가 왔다. 그는 밤 늦게 뜰에서 연을 날리고 있었다. 연에는 ‘나쁜 성질, ‘금한 성질’ ‘나쁜 말버릇’ ‘거리에서 싸움질 하는 것’ 등등의 말이 적혀 있었다. 몹시 어두웠으므로 연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연줄이 다 풀리자 그는 줄을 딱 끊어 연을 날려버렸는데 그렇게 함으로 자기의 단점을 모두 없애고 한 해를 새로운 용기로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밖에 새해에 널리 행해지는 ‘새로워짐’의 방법으로는 짚으로 사람모양을 만들어서 그 안에다 죄 지은 것이나 소원하는 것의 내용을 써 넣고 새 돈을 함께 넣는 것이다. 새해의 밤에 남의 죄를 대신해서 짊어질 거지들이 와서 ‘제용’이라고 불리는 그 허수아비를 달라고 한다. 그것을 건네주면 거지들은 그 속의 돈으로 마음의 평화를 판 셈이니 그들은 악을 지니게 되고 사람들은 악을 버리고 평화를 얻게 된다.
액막이를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서낭당 앞에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집 대문 앞에서 당한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한 노파가 자기의 슬픔과 걱정을 덜어내기 위해 닭 한마리와 쌀 한 사발을 갖다 놓았다. 살아 있는 제물이기 때문에 닭은 나무에 다리가 묶여 있었다. 놈이 꼬꼬댁 거리는 소리를 듣고 우리 집 요리사가 문밖에 나갔다가 줄을 끊고 닭을 데려 왔는데 그 후 노파가 다시 나타나자
“할머니, 할머니네 닭, 여기 있어요”하면서 돌려주려고 했더니 할머니는 겁을 먹고 두 손을 내 저으면서 자기의 닭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요리인에게 자신의 ‘근심, 걱정’을 대신 갖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조선인들은 산수(算數)에 놀라운 데가 있다. 나는 “돗자리 한 장에 얼마요?”하고 한 장사꾼에게 물은 적이 있다.
“5백 닢이요.”하는 대답이었다.
“좋소, 스무 장을 사겠소” 그러자 상인은 펄쩍 뛰었다.
“안되오. 한 장에 6백 닢을 받지 않고서는 그렇게 많이는 팔 수 없소”
그 이유는 전혀 설명할 수가 없다. 산수가 엉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뿐이다.
그들이 나이를 따지는 것 역시 독특하다. 해나 달의 회전에 의해서 나이를 계산하지 않고 새해의 떡국을 먹은 회수에 따라 계산하고, 한 해를 더 보탠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예컨대 어떤 아이가 12월에 태어나서 정월 초하룻날 가족 틈에 끼어앉으면? 태어난 지 오, 육일밖에 안됐을지라도 벌써 두 살이라고 얘기하게 된다.
그처럼 산수에는 어두워도 조선인들에게는 그런 결함을 보충할만한 다른 장점들이 있다. 우리들이 여는 종교인회의에는 조선인들이 끼지 않는것이 다행이지만 오락대회가 열린다면 조선인들이 새해의 연을 가지고 참석해 주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조선인들이 특별히 잘하는 오락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연말 연시의 수도 서울의 하늘은 민첩하게 몰려서 날거나 곳곳에서 신기하게 움직이는 연으로 뒤덮인다. 그들의 연은 날개나 꼬리가 없어 자그마하고 네모꼴이다. 그 연의 움직임은 놀랍다. 바람이 전혀 없는 날씨일 경우에도 숙련된 사람은 그의 연을 약 90도의 각도로 날릴 수 있다. 손목을 돌리거나 손을 휘젔는데 따라 연은 로케트처럼 허공에 솟는다. 다시 손을 놀리면 공중회전하는 비둘기처럼 면 번이건 되풀이해서 재주넘기를 한다. 그러다가도 가장 멀리까지 가서는 제법 힘이 든다는듯 왔다갔다하고, 망설이고, 생각하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내려온다.
해마다 정초에는 연 날리기 대회가 열린다. 목표는 적의 줄을 끊어서 그의 연을 날려보내는 것이다. 그 준비로는 줄을 명주실로 꼬아 만들어서 유리가루와 사기가루를 아교에 섞어 바른다. 그것이 얼레에서 윙윙소리를 내고 풀려나갈 때는 마치 새가 깨진 병을 가지고 벽을 향해 날아가는 것 같다. 이런 대회는 미국의 축구경기처럼 대단한 흥분을 자아낸다. 두툼한 솜옷을 입은 노인들은 전망이 좋은 곳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구경하고, 다른 관중들은 거리를 꽉 채운다. 그 고장에서 가장 뛰어난 솜씨를 가진 자가 손에 연을 들고 있다. 그 오락이 명맥을 지키는자 즉 실제의 전투원은 여러 야드씩 떨어져 서는데, 때로는 수백 야드씩 떨어져 서 있으므로 시비를 초래하는 오해가 생길 염려는 전혀 없다. 붉은 저고리와 흰 바지를 입은? 나이 어린 소년들은 모두 어떤 줄이 끊기나 또 어떤 연이 날아가 버리나 하고 조마조마해 한다.
서울에서 있은 한 대회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각처의 응원자들이 시합장에 들어서고 종복들 마져도 들떠 있었다. 순서에 따라 연들은 선정된 요지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각기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므로 연과 연이 서로 공격하게 될 위험은 전혀 없는 것같이 보인다. 연들은 얼래에서 줄이 다 풀려 나갈 때까지 멀리 가기만 한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서로 접근해서 드디어는 그 거리가 아주 가까와 진다. 연들은 서로 마주보고 공손하게 끄덕거리고 앞뒤로 나섰다 물러섰다 하면서 차차 활기를 띠고는 드디어 도발의 자세를 취한다. 이윽고 그들은 서로 급작스럽게 습격한다. 한번 스치고, 다시 스치고 빠른 속도로 덤벼들어 부딪치고 돌연 한 연이 빙그르르 돌아서 밑으로 곤두박질 친다. 구경꾼은 숨을 죽인다. 이제는 줄과 줄이 얽혀서 싸움을 시작한다. 선수들은 아교와 유리가루를 입힌 줄을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풀어준다. 그것으로 싸움은 이제 막바지 고비에 접어든다. 눈 깜잒할 사이에 한 연은 아주 의기양양해 하며 하늘에 남아 있지만 다른 것은 비틀비틀하면서 푸른 하늘 높이 떠 가고, 끊어진 줄은 인가의 지붕위로 떨어진다.
붉은 저고리를 입은, 희색이 만면한 꼬마는, 그 줄을 잡자마자 재빨리 모아쥐고 집으로 달음박질친다. 줄에 유리 조각과 아교가 칠해져 있다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한다. 누군 다른 끝을 잡고 잡아당긴다. 그러다가 이내 줄을 떨어트리고 내려다 본다. 살이 포동포동 찐 손가락에서는 설빔으로 입은 저고리처럼 붉은 핏줄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의 모습은 갑자기 억망이 된다. 비통해진 그는 집으로 가서 정초에 겪게된 슬픔과 실수를 자기 어머니에게 얘기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잔치가 벌어져 풍악이 울리고, 아낙네들은 왕조(王朝)가 선 이래로 이런 연날리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저녁이 되면 조선사람들은 집문을 닫아 건다. ‘앙괭이’라는 산타클로스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앙괭이는 하늘나라에 사는 노인으로 갖가지 물건을 모아 새해의 선물로 사용한다. 조선사람들은 신발을 문간에 놓아 둔다. 그러면 앙괭이가 섣달 그믐날 밤에 와서 그것들을 신어보고 다녀갔다는 표로 기념품을 남기고 간다. 그런데 그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인정많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일종의 악마이다. 그가 남기고 가는 선물이란 장질부사, 콜레라, 문둥병 같은 병따위다. 그래서 사람들은 앙괭이를 반가워하지 않고 가장 무서워 한다. 예컨데 어린애가 울 때 조선의 어머니들은 “얼른 그쳐라. 자꾸 울면 앙괭이가 와서 잡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양의 다른 일반 악귀들과는 달리 이 앙괭이의 경우는 주민들이 예방법을 가지고 있다. 즉 신발을 모두 들여놓고, 밤새도록 불을 켜둔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신발을 들여놓았다가 집안 식구들 한테 다른 재앙을 초래하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깊이 생각해 본 끝에 알괭이르 그냥 맞아들일 궁리를 하는 수가 있다. 그래서 여러가지 미끼를 내걸어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를 쓰는데 알고보니 문간에 놓아둔 체를 보고 알괭이가 그것에 관심이 끌려서 체의 구멍을 세는 데 정신이 팔려 신발 훔쳐갈 생각을 깜빡 잊어버렸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체를 내놓아 두기만 하면 알괭이는 그 구멍을 세느라 밤을 지새고 새벽이 되자 도망치는 바람에 새해의 유행병을 퍼뜨릴 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하여 정월 초하룻날 밤이면 체를 언제나 신발 놓는 튓마루 옆에 놓는다.
석전(石戰)은 조선의 연초에 행해지는 행사 중 독특한 것이다. 이 놀이에는 10세나 12세 밖에 안된 어린 소년들도 끼는데 나이를 더 먹어 가지고 실전(實戰)에 끼기위해 연습을 하는 셈이다. 어느 날 친구 한 사람과 나는 서대문 근처의 성벽을 따라 걷다가 성벽의 반대편에 있는 언덕 위에 도사린 패한테 10여 명의 패들이 돌팔매질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나의 친구는 아주 강경한 태도로 그 아이들의 행동을 만류하러 들었지만 아이들은 그냥 그를 보고 싱긋 웃더니, 다시 돌파매질을 시작했다. 우리들은 무척 흥미를 느끼면서 저 애들이 나중에는 어찌 되려나 하고 궁금해하며 한참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시무시하게도 돌멩이 하나가 성벽을 스치더니 키가 제일 큰 아이의 입을 모질게 쳤다. 아까부터 심히 못마땅해 하던 내 친구는 그 애를 잡아 흔들면서 “거 봐라, 내가 뭐랬니?” 했다. 아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약간 아프긴 하지만 별거 아니라는 투였다.
언젠가 나는 조선의 남쪽지역을 처음으로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이런 놀이를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에도 별로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곳에는 외국인이 가본적이 없었으므로 불행히도 나는 그곳 사람들한테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마을의 개들은 미친것 같이 날뛰었다. 그 녀석들은 아주 지칠 때까지 짖어대더니 나중에는 할 수 없는지 엎드려 버리고 말았다. 무표정하고 냉정해 보이던 마을 사람들이 잔뜩 모이더니 나를 잡아당겨도 보고 만져보기도 하고 이모 저모 살펴보았다.
경상도의 수도인 대구에 다다른 것은 정월 초하루를 하루 이틀 앞둔 때였다. 관찰사는 나졸을 보내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옷자락이 펄렁거리는 저고리를 입고 붉은 벙어지를 쓴 나졸들이 나타나서 구부러진 칼을 찬 장교인듯 한 자가 큰 목소리로 ‘노조(일종의 신분증)’를 요구했다. 관찰사가 ‘노조’를 보고 처분을 내릴것이니 남문 근처의 작은 방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동안 지방 주민들이 몰려와서 구멍마다, 모퉁이마다 안을 들여다 보려는 얼굴들로 메워졌다. 이때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구경꾼들 간의 싸움은 대단히 치열했다. 그들이 지껄인 촌평이나 의견은 하나도 좋은게 없었다. 나의 용모에 관한 나의 착각은 바로 그 정월에 그 구경꾼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 눈 좀 보래이! 파란 것이 곤두박혀 있네! 코 참 크다! 저고리는 짧고, 바지는 짝 달라붙었구나! 그놈의 나라에는 천이 없는가? 별 수 없는 오랑캐구나!”
다행히도 장교가 관찰사한테서 붉은 카드를 가지고 오더니 즉시 시내로 들어오란다고 전해 주었다. 뭐니뭐니해도 동양에서는 격식을 제대로 갖추어야 모든 일이 순조롭다. 나는 말을 타고 나졸을 앞세우고 부지런히 거리를 지나가는데 아까 성문밖에 몰려 들었던 사람들이 우리 뒤를 무작정 따라오는 것이었다. 관찰사의 앞에 닿아 밖에서 기다리고 동안 그곳의 혼란이나 무질서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이 “저게 사람인가? 귀신인가?”하고 자기네들끼리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무튼 그들이 나를 (귀)신으로 생각한다”는게 그런대로 위안이 되었다.
관찰사가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청색 저고리와 붉은 벙거지를 쓴 나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조선인 친구와 나는 문간을 지나서 1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 관찰사 앞에 닿았다. 그의 양쪽에는 시종들이 죽 늘어 서 있었다. 그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하였다. 지금 생각나는 것은 대강 이런 질문들이다. 너희 나라에는 눈이 하나뿐인 족속이 사는가, 아니면 두 눈이 다 있는 족속이 사는가? 서양 사람들은 제 이빨을 뽑아냈다가 마음대로 다시 낀다는데 사실 그런가?
그밖의 인종학적이거나 과학적인 질문이 좀 더 있은 뒤 그 인터뷰는 끝이 났고 나는 그의 아래에 있는 부사에게 인계되었다.
부사는 아주 쌀쌀하게 맞이했다. 내가 들어가자 그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해서 인터뷰가 거의 다 끝날 때까지 계속했다. 우리는 그곳에 더 앉아있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호위 나졸들도 사라지고 조선인 친구와 나만이 남아서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여전히 흥분한 군중들이 남아있어 나의 조선친구에게 난폭하게 굴었다. 다행히 군중들 가운데 관찰사의 보좌관 같은 옷차림을 한 관리가 끼어있어서 나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그는
“무슨 특별한 청이 있단 말이냐?”하고 물었다.
“사실 오늘 밤은 서양에서도 섣달 그믐날이요. 좀 조용한 곳에 가서 부모님께 편지를 쓰고 싶소. 언제나 나는 섣달 그믐날 편지를 올렸소”
“아니, 당신 아버지가 살아 계시단 말이냐?” 하고 그 보좌관은 약간 놀라며 물었다.
“그렇소, 살아 계시오. 더구나 조선에 대해서는 참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오.”
그는 내 부모가 살아 계시다는 것과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대해서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 등을 즉시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한테 말하였다.
그 말은 내가 생각했던대로 퍼져 나갔다. 나는 사람의 자식임에 틀림 없었고, 또 지극한 효성을 가지고 있음을 들어낸 셈이다. 차차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몇몇 노파는 앞문에 다가와서, 나의 어머니에 대해 큰 소리로 물었다. 동양인은 성스러운 이름,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장 중시하므로 언제, 어디서나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조선 친구 이씨도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난 사람 같았다. 그는 보좌관한테 인사를 하더니 우리들은 선전포고를 하러 온것이 아니라 평화의 사도로 왔을 뿐인데 주민들이 오해했다고 말해 주었다. 나도 이제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보좌관은 내가 편지지를 펴 놓는것을 보더니 몹시 감동한 눈치였다.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조선 양반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물론 이때에 내가 야만인이 아니라 특별히 모셔야 할 손님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명절 음식을 잘 차려오더니,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즐겼다.그 보좌관의 소개에 의해서 내가 사귀게 된 관찰사는 나에게 대추와 감을 선물로 보내주기까지 했다.
조선의 의식 중에는 묵은 해를 지키는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을 대접하러 나온 보좌관 일행은 밤 깊도록 남아서 좋은 말로 우리들을 치켜 주며 우리 서양인의 관습과 신앙에 대해서 묻기도 했다.
우리들은 다음 날 그곳을 떠나서 다시는 대구라는 그 옛도시에 가 보지 못했지만 새해가 다가오면 그때의 일들이 생각난다. 호감을 가진 일부 주민들은 우리들이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다가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가시오!” 그리고
“부디 다시 만납시다”
제임스 게일 저<코리언 스케치-장문평 역> 현암교양신서 에서
2014/1/27(월)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국(1)-제임스 게일의 '새해' 
